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

🔖 1. 자연화(naturalization)는 사실 비평가들이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약한 전략이다. 모든 규범을 지지하는(또는 전복시키는) 수많은 자연적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특정 규범들의 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자연적 질서를 사용하는 것에서 모든 규범의 모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특정 유형의 자연적 질서를 사용하는 것으로의 이동은 철학자들이 자연주의 오류의 특정 사례라고 반대해왔던 정치적 신랄함의 상당 부분을 무력화한다. 규범의 기초가 되는 자연의 유일한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러한 호소의 힘은 극적으로 약해진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규범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연사의 어떤 예를 생각해낼 수 있고, 당신은 매우 다른 규범을 지지하는 똑같이 자연스러운 은유로서 다른 많은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다. 벌의 모계제 대 개코원숭이의 가부장제가 그 예이다. 논쟁의 당사자 모두가 자연을 휘두를 수 있기에, 자연은 정치적 논쟁에서 더는 강력한 무기가 아니다.

2 . 자연에 대한 호소는 근본적으로 자연 질서와 규범성 그 자체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자연 질서와 어떤 특정한 집합 또는 규범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내 두 번째 답변으로 인도한다. 도덕 질서에 대한 환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연 질서에 호소하는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질서와 규범성 그 자체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질서와 어떤 특정한 규범들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자연에 대한 호소를 오류로 만드는 것은 질서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함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통 외에도, 자연의 순수한 규모와 내구성이 대부분의 인류사에서 가장 인 상적인 유물의 규모와 내구성을 훌쩍 능가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연의 질서는 사실상 인간의 질서에 비해 더 질서정연하며, 이는 왜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해 소환되었으며 그 반대는 아닌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3 . 인간의 몸에 딸린 이성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성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원칙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더 완벽하다고 추정되는 다른 유형의 이성에 대한 철학자들의 갈망은 공개적으로든 은밀하게든 신학에 얽매여 있다. (…) 그러나 그들 또한 우리 자신보다 더 완벽한, 몸과 감각이 전혀 다르거나 신체와 감각이 전혀 없는 천사나 신과 같은 지성적 존재에 대한 꿈과 우상숭배의 은유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했다. 인식론은 여전히 칸트의 불가사의한 비인간적인 이성적 존재나 화성인 또는 다른 가능한 세계의 거주자들에 대한 천사학의 사고실험을 마음껏 펼친다. 신학은 인식론을 계속 따라다니며, 우리 종족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성의 형태에 대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충족시킨다. 칸트는 그 한계를 초월하려는 이성의 야망에 대해 경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약 우리가 구체적으로 인간 이성의 능력을 탐구한다면, 우리는 글자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정신적으로라도 칸트를 따를 수 있다.